제1장 석가의 탄생
1. 샥카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가 샥카족 출신의 성자라는데 대해서는 오래된 경전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왕사성의 빔비사라 왕이 출가한 태자에게 "어디 분이십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태자는 "히말라야 산 기슭에 있는 나라의 사람인데, 씨로 말하면 아딧챠고, 성으로 말하면 샥카족의 사람이노라"고 하였다 한다. 이 족속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샥카의 인도음을 중국에서는 석가라고 음사했던 것이다.
이 종족은 히말라야산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의 네팔 남쪽 국경에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이 종족은 인도 아리얀 계통의 한 지족이었던 모양인데, 한편에서는 아리안이 아니라 스키타이족에 속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한 것은 영국의 역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였는데, 아직 이에 대해서는 가부를 결정할 만큼 충분한 증거가 박약한 형편이다. 그러나 설사 인종적으로는 몽고 계통이었다 할지라도, 문화적으로는 다분히 인도 아리안족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불경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샥카족은 자기에 종족의 계보를 무척 자랑하고 있는데, 그러한 계보에 관한 신화를 믿는다면, 샥카족은 아리안이어야 하는 것이다. 석가를 앙기랏사라고 불렀던 사실이 경전에 나타나 있고, 또 그 씨족의 이름이 아아딧챠였던 것을 관련지워 생각해 보면, 샥카족은 아리안인들 중의 태양씨족임을 자부했던 사실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아리안족의 태양 씨족은 간지스강 북안에 위치해 있었고, 달 씨족이 그 남안을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으므로 위의 추측은 있음직한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이크슈바아쿠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아리안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인데, 그에게는 사남오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카필라라는 선인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 사왕녀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크슈바아쿠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샤아카' 또는 '사아카'란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서울이 카필라 선인의 암자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카필라바스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설은 <아마주경>을 비롯해서 불전 관계의 경전에서는 거의 다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진실여부는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여튼 샥카족은 스스로 이웃 나라 코살라나 마가다 등에 비해 오랜 전통 있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진 왕국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2. 샤카족의 정체와 도시
샤카족의 나라는 전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강을 사이에 두고, 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콜리야족이라고 부른다. 샥카족은 서울을 카필라성에 두었었고, 이 콜리야족은 그들의 서울을 천비성이라고 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샤카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 공화정체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전에 공회당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코살라 왕국은 카시국을 점령하고, 샥카족의 나라를 보호령으로 하고 있었다. 샥카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 마가다와 코살라, 두 나라 외에 두 강국은 우전왕 치하의 방사국과 챤다 팟죠오타왕 치하의 아반티국이었다. 석가의 말 가운데에 "정복하고 정복당하고, 그런 일없이 나라를 다스려 갈 수는 없는 일일까?"라는 것이 있는데, 이 말로 미루어 당시의 사회는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콜리야족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샥카족의 조상이 된 사왕자, 오왕녀 중 제1위의 왕녀 이름을 ‘피야아’라고 하는데, 나병을 앓고 혼자 쓸쓸히 살고 있던 테에, 같은 병을 앓고 있던 베나레스의 왕 라마가 유랑해와 서로 도우면서 같이 살게 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그때 이곳에는 호랑이가 많고 그 해가 심했으므로 이 호랑이들을 막기 위해, 대추나무를 쭉 줄지어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추나무의 마을이라고 하여 그 종족을 콜리야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샥카족과 콜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을 비롯해 하천이 많고, 지미도 비옥하고, 목축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석가 일가의 가문의 이름을 고타마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샥카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다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샥카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의 중국 순례승 현장은 <대당서역기>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시기에 파종을 한다. 사계의 운행은 규칙적이며 풍속은 화창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다. 석가의 부왕의 이름을 숫도다나(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은 짐작이 간다.
카필라바스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샥카족의 서울이다. 슈라아바스티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카필라푸라라고 적혀 있고, 또 카필라흐바야라고 한 곳도 있다. 모두 카필라 선인과 관련지워서 말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 카필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지 그 역사성을 알 수는 없다. 카필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개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튼 카필라성 근처에는 '로히니'라는 강이 흐르고 있은 것은 사실이며, 이 로히니라는 이름이 '빨갛다'는 인도 말과 비슷하므로 그 강물이 빨갛다는 등의 설명이 있으나 그것은 말의 수식상 그렇게 이야기한 정도로 알아두어야 될 것이다. 이 도시의 성 밖에 니그롯다라마와 마하바나란 숲이 있었다. 이곳은 석가가 나중에 즐겨 머무른 곳이다.
3. 석가의 탄생
석가의 아버지를 숫도다나라고 한다. 그는 샥카족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 부왕 즉 석가의 할아버지를 신하라누라고 한다. 경전에서는 숫도다나를 왕이라고 부르기는 하나, 결코 대왕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반대왕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다.
어머니의 이름을 마야 부인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같은 샥카족의 한 별계인 콜리야족의 공주였던 것이 틀림없다. 때로는 마하마야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존칭일 것이다.
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가를 낳은 것은 아마 왕이 마흔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석가의 탄생이 이 가문의 얼마나 큰 경사였을까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야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 흰 코끼리가 배속으로 들어가는 길한 꿈을 꾸었다는 등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마야부인은 임기가 차서 고향인 천비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룸비니라는 꽃동산에 이르러, 갑자기 산기가 있어 사방에 만막을 둘렀다. 부인이 꽃이 만발한 무우수의 가지를 쥐려고 하는 순간에 아기를 해산했다고 한다.
4. 룸비니
석가의 탄생지가 룸비니인 것은 여러 가지 사실이 확실하게 증거함으로 틀림없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오랜 시구에는 석가가 "샥카족의 마을 룸비니의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쓰고 있다. 또 지금 바스티 지방의 둘하 동북방 8킬로미터로 네팔 국경에 가까운 곳에는 파다리아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에 룸민디라는 사원이 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한 석주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석가가 죽은 뒤 백 년 후에 그곳을 순례한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온화한 왕은, 즉위 관정 후 20년에 스스로 여기에 와서 제사를 드렸다. 여기서 붓다 샥카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팔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
다소 편찬시대가 내려가는 경전들 속에서 우리는 룸비니로 순례하는 것을 권장하는 말들을 볼 수 있는데 아쇼카왕도 고승 우파굽타의 권고로 이곳을 찾은 것이라고 전설은 말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현장도 이곳을 찾았는데 그는 그 <대당서역기> 안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전천의 동북으로 8, 90리를 가면 룸비니 숲에 다다른다. 샥카족의 연못이 있다. 맑고 깨끗하기 거울과 같으며, 여러 가지 화초가 만발해 있다. 그 북으로 스물 다섯 걸음쯤 가면, 무화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말라죽어 있다. 보살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 사천왕이 받드는 태자의 탑 옆 멀지 않은 곳에 큰 석주가 있는데, 그 위에 말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무왕(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다. 뒤에 악용의 벽력 때문에 그 기둥의 중간이 부러져 땅에 넘어져 있다.
이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휴우레르씨에 의해서다.
5. 탄생 연대
석가의 탄생 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확실히 단정할만한 연대 확정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자료들 사이에 공통된 사실은 석가가 80년 동안 생존해 있었다는 것인데, 그 연대 산출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근거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은 아쇼카왕의 즉위연대다. 아쇼카왕의 즉위연대는 물적 증거로 남은 그 비명의 검토로써 대개 BCE 268, 267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중에는 석가의 열반이 아쇼카왕 즉위 전 218년이라는 설과, 100년이라는 설의 두 가지로 나눈다. 전자에 속하는 문헌에는 <디이파밤사> <마하아밤사> <선견율> 등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문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잡아함경> <아육왕전> <승가라찰소집경> <중경찬집비유> <현우경>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대지도론> 그 밖에 몇몇 산스크리트 경전이 있다.
전자에 의하면 불멸 연대는 BCE 486년이 되고 후자에 의하면 불멸 연대가 BCE 368년이 된다. 따라서 전자에 의하면 석가 탄생 연대가 566년이 되고, 또 후자에 의하면 석가 탄생 연대가 448년이 되는 셈이다. 최근 1956년에서 1957년에 걸쳐서 실론, 타일랜드, 버어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남방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석존 2500년 기념식전을 성대히 거행한 바 있다. 그것은 남방불교의 전설에 따라 석존의 입멸을 서기전 543년으로 잡고, 그 입멸 25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연대는 서양이나 인도의 역사가들로부터는 한결같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아쇼카왕 즉위의 사실과 많은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도승 상가바드라는 서기 489년경 중국 광동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가 서사본 위에다 찍어 온 석존 열반 후의 햇수를 기록한 점이 975년에 달했다 한다. 이것에 기초해서 석존 입멸의 시기를 환산하면 불멸 연대가 BCE 486년이 된다. 이 서사본을 <중성점기>라고 하며, 일본의 불교학 개척자 다까구스 쥰지로오는 이에 근거하여 석가의 탄생 연대를 BCE 566년으로 정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파알리어 경전들의 연대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각기 여러 가지 자료들을 검토하고 불멸 연대에 관하여 BCE 544년, 484년, 483년, 482년, 478년 477년, 388년, 386년, 383년, 380년, 370년, 368년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독특한 전통적 견지를 지켜 금년에 불탄 2991년 축제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계산법에 의하면 불탄 연대는 BCE 1026년이 된다.
6. 탄생에 관한 옛 전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 <숫타니파타>에 의하면 석가는 '투시타'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태중에 잉태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존자 사리풋타는 말했다. 그와 같이 말씀이 아름답고, 뭇 사람들의 주이신 스승이 투시타천에서부터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 경전은 내려오신 석가를 보디삿타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보디삿타는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석가가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은 이 어린 태자의 장래에 관한 예언을 하였는데, 이 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즐거이, 깨끗한 옷을 입은 서른 명의 신들이 옷을 붙잡고, 공손히 제석천을 극구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아시타 선인은 식후의 휴식 중에 보았다.
기쁨에 뛰노는 신들을 보고 선인은 공손히 이렇게 물었다.
"신들께서 몹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옷을 붙잡고, 흔들며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아수라와의 싸움이 있어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가 졌다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희귀한 일을 보시고 신들은 기뻐하시는 겁니까?
이에 대하여 신들은 대답해 말했다.
"비할 수 없이 훌륭한 보배이신 그 보디삿타가 모든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간세계에 태어나신 겁니다. 샥카족의 마을에, 룸비니의 지방에, 그래서 우리는 만족하고,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의 가장 윗자리에 계신 분, 가장 높으신 분, 황소와 같으신 분, 살아있는 모든 것 중의 훌륭하신 분은 머지 않아 선인이라는 이름의 숲에서 법륜을 돌리실 겁니다. 사나운 사자가 백 가지 야수를 물리치고 으르렁대는 것과 같이."
선인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내려왔다. 그때 정반왕의 궁전에 가까이 가 거기에 앉아서 선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자가 어디 계십니까? 저도 뵈옵기를 원하옵니다."
그래서 여러 샥카족 사람들은 재간 좋은 대장장이가 용로에서 단련한 황금과 같이 빛나고, 행복한 빛을 발하는 귀한 얼굴을 가진 아기를 아시타 선인에게 보여주었다.
화염과 같이 빛나고, 하늘을 가는 별들의 왕과 같이 맑고, 구름한점 없는 가을 하늘의 태양처럼 빛나는 아기를 보고, 저절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신들은 많은 살로 바쳐진, 그리고 천 개나 되는 원륜이 있는 산개를 공중에 바쳤다. 그리고 또 황금의 손잡이로 된 불자로써 아래위로 부채질을 하였다. 그러나 불자나 산개를 붙들고 있는 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칸하시리'란 결발의 선인은, 머리 위로 흰 양산이 덮여 있어 마치 불그스레한 모포 속에 있는 황금의 장신구와도 같은 이 아기를 그냥 기쁨에 넘쳐 안았다.
상호(相好)와 신주에 통요한 그 선인은 샥카족의 황소처럼 훌륭한 아기를 받아 안고, 보더니 마음으로부터 환성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비할 바 없이 높으신 분입니다. 사람 중에 제일 높으신 분입니다."
그 때에 선인은 자기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며, 슬픈 마음이 생겨 눈물을 흘렸다. 선인이 우는 것을 보자 샥카족의 사람은 말했다.
"우리 왕자님께 무슨 지장이 있는 것일까요?"
샥카족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본 선인은 말했다.
"저는 왕자님께 불길한 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께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이분은 범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시켜 주십시오.
이 왕자님은 정각(正覺, 부처님이 되는 것)의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이 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法輪, 진리의 수레바퀴)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은 길지 않습니다. 중도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 겁니다. 저는 이 비할 바 없이 강한 힘을 가진 분의 교법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스스로 한탄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 청정행의 소유자,아시타 선인은 샤카족에게 커다란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궁정에서 물러갔다.
그는 자기의 조카 나아라카를 불쌍히 여겨 이 무비의 힘있는 분의 교법에 따를 것을 종용하였다.
"만일 네가 나중에 '부처님이 있어, 정각을 이룩하고 진리의 길을 걷고 계시다' 이런 소리를 듣거든, 그때 거기에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 세존 밑에서 청정행을 행하라."
이 이야기에도 적지 않은 신화적 수식이 있기는 하나 후세의 불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단적인 분식은 없다.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는 그런 관점에서 <숫타니파타>의 이 전설이 후대의 불전에 보이는 많은 전설의 원형이거나 선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에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사자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말귀가 이른바 '탄생게'라는 것으로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으므로 갑자기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의 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전설에는 태자의 장래에 관한 점복에 있어서도, 두 가지 복상을 드는 일이 있다. 이 갓난 태자가 곡 부처님이 되리라 하는 것은 앞서 인용한 <숫타니파타>의 설이고, 또 하나는 왕자가 속세에 그대로 머무른다면, 전륜왕(轉輪王, 강력한 대군주)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부처님이 될 것이란 설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와 같은 예언이 다분히 후세의 착색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붓다' 즉 '각자'란 개념이 석가의 성도 전에 어떻게 알려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예언이란 사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구체적이었을가 하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 셈이다.
위에 언급한 것과 다른 다음과 같은 몇몇 이설이 있다. 보디삿타가 육아의 흰 코끼리 모양으로 어머니 태중에 들어왔다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흰 코끼리가 아니라 여섯 달 된 유아의 모습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고, 또 보디삿타가 태중에 있었던 것이아니라 한 보석함 속에 들어 있었고, 연꽃 속에서 생긴 선약의 물방울로 키워졌는데 이 선약의 물방울은 범천 자신이 받아서 주었다는 것이다. 또 불전에 따라서는 열 달 동안 계속된 잉태 기간 중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는 도덕적으로나 육신상으로나 일체의 결함이 없었고, 따라서 부정한 욕정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석가가 탄생한 바로 그날, 보디삿타의 미래의 배필과 미래의 마부, 미래에 그가 쓸 말, 그리고 그와 동시대인인 많은 왕들이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관상예언을 한 선인의 이름은 다른 파알리어 경전에서는 '카알라데발라'라고 하고 있어 그 점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해명이 필요하다.
태자가 탄생한지 닷새만에 그 아버지는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뜻은 '목적을 달성한' '일체의 의, 미덕, 성격이 성취된'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원시경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후대 사람의 가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어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다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 전설을 부정할만한 적극적인 자료도 적은 것이다.
또 후세의 불전에 의하면 그의 생모 마야 부인은 산후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도 원시경전에는 적혀 있지 않으므로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부정적인 근거도 없으므로 사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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